[이구순의 느린걸음] 블록체인, 제도(制度)와 규제(規制)

이구순 느린걸음

블록체인·암호화폐 산업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할 무렵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가 있었다. 이 업계 사람들은 만날 때 마다 “규제(規制)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기자 생활 꽤 오래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규제는 늘 줄어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단어와 짝이었다. 새로 정부가 들어설 때면 규제 혁신, 규제 폐지는 늘 최우선 정책목표였다. 폐지된 규제의 숫자를 정책성과로 자랑하는 정부도 있었다. 그런데 업계가 스스로 규제를 만들어 달라니…

오래 알고 지내던, 마침 블록체인 사업을 하는 이에게 물었다. 규제를 만들어 달라고 나서는 업계의 속내가 뭐냐고. 그 지인은 “규제를 만들어달라는 말이 아니고, 규제라도 만들어 달라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업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 조차 없어 시장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니, 정부가 규제라도 만들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생길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요청하는 것”이라며 “오죽하면 업계가 규제를 만들어달라고 하겠느냐”고 했다.

제도(制度)는 제정된 법규, 나라의 법칙이다. 규제(規制)는 규칙이나 규정에 의하여 일정한 한도를 정하거나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산업이 처음 생길 때 정부는 규칙을 만든다. 규칙에 따라 산업이 성장하고 시장이 만들어져 국민이 피해를 입거나 다른 산업이 불이익을 당하면 하나씩 규제를 만든다. 이것이 규칙을 정하는 순서다. 그래서 신산업에 대해서는 진흥법부터 만든다. 그리고 진흥법에 규제조항들을 하나 둘씩 더한다.

그러니 블록체인·암호화폐 업계 사람들은 규칙을 정해 달라고 정부를 향해 요청한 것이다. 블록체인·암호화폐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해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가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국회는 올해 정기국회 회기 안에 법 개정을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암호화폐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첫 법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강력한 진입장벽부터 보인다.

개정안은 전자적으로 거래에 이용되거나 가치를 이전할 수 있는 모든 증표는 가상자산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정의했고, 암호화폐 거래소, 투자사, 관련 기업들을 원칙적으로 정부의 인·허가 범위 안에 넣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법안을 자세히 들여다 본 업계에서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권고안 보다 특금법의 신고요건이 더 강력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신고요건과 정부의 인·허가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넘겨놨다. 법안이 의결되면 이제 공은 대통령령을 작성할 금융위원회와 금융정보분석원(FIU) 같은 금융당국으로 넘어간다.

설마 정부가 ‘규제라도’ 만들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해달라는 블록체인·암호화폐 업계의 애원을 아예 시장진입을 막는 진짜 규제를 만드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금융당국이 이제 막 틔워보려고 하는 신산업의 싹을 자르는 시행령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시행령을 만들 정부 당국자들이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산업을 하겠다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한다. 신산업이라고 생겼는데 결국 나이 먹은 몸집 큰 기업들만 넘을 수 있는 높은 장벽을 만들어 신산업에 새 기업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규제는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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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부터 IT만 취재한 기자였고, 현재 블록포스트 취재파트를 이끌고 있다. 신상, 신기술, 신산업에 호기심이 많아 늘 새것을 찾아다닌다. 당연히 블록체인에 강한 호기심과 애정을 키우고 있다. 상대방의 얘기를 신중히 듣고 현실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